Hyoseok Kim.

사탄탱고를 읽고 - 발제문

발제문

소감 나누기

가볍게 간략한 소감을 나누어봅시다. 이 책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문장, 혹은 마음에 남은 감정이 있었나요?

저는 이리미야시의 연설 파트가 제일 인상적이었어요.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나, 실제로는 아무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그저 자신들의 문제(무력감, 절망감)를 해결해주기만을 바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하면서도 공감이 되기도 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올라왔어요.

(p.253) 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는 갑작스럽고 은밀하며 불안정하지만 억제할 수 없는 어떤 안도의 표정이 어렸다. 여기저기서 짧은 탄식들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재채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몇 시간 동안 내내 기다려온 것이 바로 "현재보다 합당한 여러분의 미래"라는 마음을 해방시켜주는 말이었던 까닭이다.

(p.288) 그가 그 바보 계집아이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사실 우리가 듣고 싶어 한 얘기는, 자 이제 그만, 사람들아,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이제 그만 우울해하고, 뭐가 쓸모 있는 일을 벌여보자, 같은 거였단 말이야. 한데 웬걸!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죄를 지었는가요, 라니! 그런 말을 들으면 이성이 멈춰버리지. 그가 장난을 치는 건지 진심인지 아무도 몰랐을 거야. 우리는 그에게 그만 말하라는 소리조차 못했고, 그 아이는? 그래, 쥐약을 삼켰어. 그런데 어쩌라고? 불행한 아이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적어도 더는 괴롭지 않잖아.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구원과 주체성

사탄탱고의 구성은 제법 암울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을 바라고, 결국 실패하고, 절망하며 다시 구원을 바라는 이 '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망적이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과연 '주체적'일 수 있을까요? 자유롭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의 그늘 아래에 머물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 있지 않은지 궁금해졌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 반대로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나서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있었나요? 우리는 어떨 때 그저 구원만을 바라게 되고 도망치고 싶게 되는지, 어떨 때 스스로를 구하게 되는 걸까요? 경험과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

  1. 무력감을 느꼈을 때, 스스로 헤쳐나가기보다 누군가 해결해주길 바랐던 경험이 있나요? 그때 실제로 도움이 됐나요, 아니면 기대와 달랐나요?
  2. 마을 사람들은 이리미야시에게서 구원을 기대했지만 결국 또 다른 착취를 당합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사람, 조직, 신념 등)이 기대와 다르게 느껴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주세요.

(p.71) "주인 잃은 노예들인 주제에 명예와 자부심과 용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들 하지, 그 믿음으로 저자들은 살아가는 거야. 둔한 마음 깊은 곳에선 저런 덕목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있겠지만 말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저 말들의 그늘 속에서 살고 싶은 것뿐이니까."

(p.220) 모두가 무력감에 사로잡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한 시간, 한 주, 한 달이 가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종일 정든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시간을 보냈고, 어쩌다 돈이 조금 생기면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술을 마시는 데 써서 없애버렸다.

함께 또 따로

사탄탱고의 인물들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서로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욕망과 필요에 집중하는 느낌이었어요.

이 소설의 배경과 쓰인 시기는 1980년대,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려던 시대로 현대와 다른 시대와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진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냉담함은 현대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현대 시대에 발생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기후위기, 노인 빈곤, 소수자에 대한 폭력 등)이 단지 시스템의 부산물인지, 아니면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소설에서도 에슈티케가 쥐약을 먹었을 때, 마을 사람들, 호르고시 부인마저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듯합니다. 에슈티케의 외로움과 방치된 상태는 조명받지 못합니다. 제일 가까운(?) 존재인 '서니'도 마찬가지로 에슈티케를 이용해 돈이 자라는 나무 이야기를 하며, 그저 현혹할 뿐이었죠.

  1. 우리는 함께 이 세상을 살아나아가지만, 나의 이해관계를 벗어난 타인의 고통에 어디까지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나 이외의 대상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나 경험을 나누어주셔도 좋고, "내 일이 아니면 관심 가지기 어렵다"는 명제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주셔도 좋겠습니다.

마무리

사탄탱고는 묵시록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떤 불편한 질문을 남기는 소설 같았어요.

스스로에게,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어떤 질문이 남았는지, 혹은 어떤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는지를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갈무리

(p.71) "주인 잃은 노예들인 주제에 명예와 자부심과 용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들 하지, 그 믿음으로 저자들은 살아가는 거야. 둔한 마음 깊은 곳에선 저런 덕목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있겠지만 말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저 말들의 그늘 속에서 살고 싶은 것뿐이니까."

(p.220) 모두가 무력감에 사로잡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한 시간, 한 주, 한 달이 가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종일 정든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시간을 보냈고, 어쩌다 돈이 조금 생기면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술을 마시는 데 써서 없애버렸다.

(p.321) 뿌리칠 수 없는 구속과 시간을 뛰어넘은 대담한 도약 사이에서, 영원히 실패하는 감각이 아닌 오로지 환상만이 우리로 하여금 비참한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끔 유혹하지, 하지만 도망칠 길은 없어.

(p.288) 그가 그 바보 계집아이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사실 우리가 듣고 싶어 한 얘기는, 자 이제 그만, 사람들아,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이제 그만 우울해하고, 뭐가 쓸모 있는 일을 벌여보자, 같은 거였단 말이야. 한데 웬걸!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죄를 지었는가요, 라니! 그런 말을 들으면 이성이 멈춰버리지. 그가 장난을 치는 건지 진심인지 아무도 몰랐을 거야. 우리는 그에게 그만 말하라는 소리조차 못했고, 그 아이는? 그래, 쥐약을 삼켰어. 그런데 어쩌라고? 불행한 아이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적어도 더는 괴롭지 않잖아.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p.407) '구제'되어야 할 사람들을 '구원'의 맥락에서 다루는 이 소설에서 기이한 종소리의 실체를 확인한 사람은 의사밖에 없다. 의사는 종소리의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인간의 삶에 지금껏 알지 못했던 추진력을 부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